현대 무기 안 만든다던 레고, 시민단체 시위로 뒤늦게 신제품 출시 철회

세계 최대 장난감 제조업체이자 덴마크 7대 기업인 레고가 신제품 출시 계획을 전면 철회한다고 7월21일 발표했다. 신제품이 전쟁을 미화한다는 반대 여론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레고는 벨-보잉 V-22 오스프레이(Bell-Boeing V-22 Osprey) 틸트로터를 민간 구조용으로 개조해 올 8월1일 레고 테크닉 42113으로 발매할 계획을 올 초 발표했다.

V-22는 양 날개에 달린 프로펠러를 이착륙시 수직으로 들어올려 헬리콥터처럼 신속하게 기동하는 점이 특징이다. 비행 고도에 오르면 프로펠러를 수평으로 돌려 일반 항공기처럼 운항해 기동성과 항속 거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호평을 받는다. 2007년 미국 해병대를 시작으로 미 공군 및 해군이 V-22 오스프레이를 도입해 애용한다. 2019년 10월 초를 기준으로 미군이 운항하는 V-22 오스프레이는 375기로 총 비행 시간이 50만 시간을 넘었다. 2017년 8월에는 일본 자위대도 V-22 오스프레이를 도입했다.

레고가 2020년 7월21일 출시 계획을 전면 철회한 레고 테크닉 42113 벨-보잉 V-22 오스프레이

문제는 현존하는 모든 V-22 오스프레이가 군용이라는 점이다. 인명구조용 민항 V-22 오스프레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라크와 예멘, 말리,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 지역에 배치돼 구조작전 뿐 아니라 공격 및 침투 작전에도 쓰인다. 2011년 5월 미국 특수무대가 사살한 테러 단체 알카에다(Al-Qaeda)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의 시신을 수습할 때도 V-22 오스프레이가 활약했다.

미 해병대 병력을 수송하는 V-22 오스프레이(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즈)

“레고 씨, 현대 무기 안 만든다고 하셨잖아요?”

레고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기업이다. 2030년부터 플라스틱 대신 생분해되는 사탕수수를 레고 블록 원료로 쓸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레고 영화 가이드라인에는 연인이 사랑을 표현할 때 입맞춤 대신 손을 맞잡도록 규정했다. 여성 권익신장을 위해 여성 과학자 시리즈를 선보이기도 했다.

특히 다수 장난감 제조업체가 무기를 본 뜬 제품을 만들어 쏠쏠히 재미를 보는 와중에도 레고는 꿋꿋이 무기를 만들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1978년 레고 캐슬(Lego Castle) 제품군을 내놓으며 중세 전쟁을 재현하기 시작하고, 1999년 스타워즈 라이센스 제품을 만들며 미래 전쟁 무기를 만들긴 했어도 끝내 현대 무기는 만들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덕분에 레고는 세계 최고 브랜드로 꼽히는 명예도 여러 차례 누렸다.

“현실적 무기와 군사 장비를 만들지 않는 근본적 목적은 어린이가 레고 제품을 논하며 전 세계 분쟁 지역을 인지하고 폭력성을 내보이거나 겁먹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또 레고 브랜드가 분쟁과 비윤리적이고 위험한 행위를 미화하는 일에 연관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 목적이다.” 2010년 레고 발전 보고서(Progress Report 2010)

이런 레고가 세계 굴지 군수업체가 제작해 현재 군에서 공격 및 침투 작전에 쓰는 군용항고기를 모델 삼아 신제품을 만들어 내놓으면 역풍이 부는 건 당연해 보인다. 독일 반전 시민단체 독일평화재단(DFG-VF)은 군수업체에서 정식으로 라이센스를 받아 만든 레고 신제품이 팔리면, 여기서 생긴 수익 일부가 군수업체로 흘러가는 점을 지적하며, 레고가 간접적으로라도 군수업체를 지원하면 안 된다고 항의했다.

“이 군용 항공기가 전 세계에 배치된 탓에 수 많은 민간인이 살해 당했습니다. 이게 부모와 레고 고객, 레고 팬이 이 항공기를 본 뜬 제품에 반대하는 까닭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인간에게 고통과 죽음을 선사한 무기를 만드는 기업은 레고와 협업하면 안 됩니다. 바로 이런 연유로 레고가 2014년 논란 많은 석유 업체 셀(Shell)과 협업을 중단했죠. 이 신제품을 내놓으면 레고는 스스로 세운 기본 원칙을 어기게 됩니다.”

V-22 오스프레이를 만든 보잉은 세계 2대 군수업체다. 2018년 군수 사업 부문 매출은 27조8995억 원(231억8500만 달러)에 달한다. 보잉과 V-22를 함께 만든 벨(Bell)도 세계 27대 군수업체다.

보잉 2018년 연례보고서 발췌

매장 앞 시위대에 ‘화들짝’ 레고, 이튿날 출시 철회

독일평화재단은 ‘브릭은 사랑하고 전쟁은 미워하라‘(Love Bricks Hate War)는 웹페이지를 만들어 이 소식을 알리고 V-22 오스프레이 출시에 반대하는 서명을 모았다. 출시를 열흘 앞둔 7월20일에는 독일 각지 레고 매장 앞에서 반대 시위를 시작했다.

2020년 7월20일 레고 베를린 매장 앞에서 독일평화재단(DFG-VF)이 V-22 오스프레이 출시 반대 시위를 벌였다(사진: 독일평화재단 제공)

레고는 시위로 사안이 불거진 이튿날인 7월21일 V-22 오스프레이 제품 출시 계획을 전면 철회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 제품은 혁신적인 엔지니어링 기술과 지진, 태풍 같은 자연 재해 시 전 세계를 누비며 구조 작업을 수행하는 해당 항공기를 선보이려는 의도로 고안됐습니다. 이 세트는 인명구조선 콘셉트로 제작됐으나, 해당 항공기가 군사용으로만 사용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됐습니다. 레고 그룹은 군사용 운송 수단 관련 제품은 판매하지 않는다는 오랜 정책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내부 검토를 거쳐 이 제품을 출시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불편을 끼쳐 드리게 된 점 사과 드립니다.”

미카엘 슐츠 폰 글라베르(Michael Schulze von Glaßer) 독일평화재단 대표는 레고의 신속한 결단이 ‘기대를 뛰어넘었다’고 평했다. 이미 전 세계 매장으로 배송된 신제품 출시를 막기는 무리라고 예상했는데, 레고가 모든 제품을 회수하고 처분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독일평화재단은 레고가 V-22 오스프레이 제품을 출시할 계획이라고 알린 올 2월부터 연락해 일이 커지기 전에 수습하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재단은 레고 측에 V-22 오스프레이가 군용으로만 쓰인다는 사실을 알리려 수 차례 연락을 시도했으나 모두 답변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출시 철회라는 목표를 달성해 만족한다고 미카엘 슐츠 폰 글라베르 대표는 말했다.

“앞서 레고 일부 부서와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레고가 잘못을 시인하고 출시 계획을 철회해 우리 모두는 기쁩니다. 이런 결정이 쉽지 않았으리라는 점을 이해합니다. 레고가 앞으로도 자사의 훌륭한 가치를 고수해주길 바랍니다.”

유출된 제품에는 6배 프리미엄

레고 테크닉 42113 벨-보잉 V-22 오스프레이 출시 철회 사건은 레고 측의 전면 출시 철회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여파는 남았다. 레고가 출시 계획을 전면 철회하며 제품을 회수했으나, 일부 소매점이 예약 구매자에게 미리 판 제품은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출된 제품은 다시는 구할 수 없는 한정판이 돼 가격이 천정부지로 솓구치는 중이다. 원가는 19만6500원(140유로) 정도였던 레고 테크닉 42113 벨-보잉 V-22 오스프레이가 이베이 등 온라인 경매 사이트에서는 120만 원(1000달러)이 넘는 값에 거래되는 상황이다.

온라인 경매 사이트 이베이에 올라온 레고 테크닉 42113 벨-보잉 오스프레이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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