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학생 일기] 덴마크 교환학생 생활을 마치고

방문을 열었다. 한국과 다른 노란 조명에 놀란 것도 잠시. 비에 젖은 가방을 방에 들여다 놓고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무선 인터넷을 설치하고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잘 도착했다고 연락했다. 비에 젖은 몸을 씻고 침대에 누우니 비로소 혼자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곁에 아무도 없이 혼자 남겨지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내가 여기서 혼자 한 학기를 보낼 수 있을까…

갑자기 눈물이 울컥하면서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도 잠시. 코펜하겐에 도착한 후 일주일은 정신 없이 흘렀다. 시차 때문에 아침 일찍 눈 떴다. 온종일 각종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에 참석했다. 주변 지리를 익혔다. 필요한 물품을 샀다. 새로운 사람과 만났다. 집에 들어오면 쓰러져 잤다. 생각할 틈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시간을 바쁘게 보냈다.

‘쿨 보이’ 덕분에 편견을 깨부수다

이런 삶에 브레이크를 걸어준 사람은 우연히 만난 한 아랍인 남자였다.
나는 자전거 왕국 덴마크에 왔으니 자전거를 타고 코펜하겐 곳곳을 구경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다. 교통비도 아끼고 다이어트도 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열심히 중고 거래 웹사이트를 뒤져 원하는 자전거를 찾았다. 바로 판매자에게 연락했다. 자전거를 사 집에 돌아오겠다는 부푼 꿈에 들떴다.
그런데 자전거를 사러 집을 나서기 몇 시간 전부터 갑자기 휴대전화 3G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덴마크의 인터넷 환경이 나쁘다고 생각한 채 별 생각 없이 자전거를 사러 떠났다. 지하철에 내려 판매자 집을 찾아 가려고 구글 지도를 켰지만 여전히 인터넷은 안 됐다. 때 마침 학교에서 나눠준 코펜하겐 지도가 가방에 있어 길 이름을 찾아 부지런히 걸어 판매자 집 앞에 도착했다. 이 때도 나는 자전거를 사서 돌아갈 생각에 들떠 있었던 것 같다.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내가 어리석었다. 집 앞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판매자에게 전화하려는 데 전화가 걸리지 않았다. 문자도 보낼 수 없었다. 그제야 학교에서 나눠준 선불 USIM 요금을 다 썼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처음 가 본 낯선 동네, 판매자 집 앞에서 나는 판매자에게 연락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주위에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한 통만 빌려달라고, 유심이 망가진 것 같다고, 자전거를 사야 하는데 구매자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다고 열심히 얘기했지만 그들 모두 “No, I don’t want to”라고 잘라 말했다. 하긴 누가 낯선 외국인에게 쉽게 핸드폰을 빌려주고 싶으랴. 눈앞이 깜깜했다.
허탕 치고 집에 돌아가야 하나 고민할 때, 나를 향한 시선이 느껴졌다. 한 아랍인 남자가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서웠다. 아마 내가 갖고 있던 아랍인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얼른 눈을 피하고 걸어가려는데 멀리서 그 사람이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이 있냐며, 자신이 도와줄 일이 있냐고 말이다.
내가 타기엔 너무 큰 탓에 자전거를 사지는 못했지만, 아랍인 남자가 도와줘 나는 판매자와 연락을 했다. 그는 잘못된 주소를 찾아간 나를 판매자 집 앞까지 데려다 줬다. 고맙다고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내게 그는 쿨하게 “Bye Bye”를 외치며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가며 나는 외모만으로 그 사람을 피하려고 했던 내 행동을 반성했다. 여러 사람을 만나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겠다고 당차게 교환학생 지원서류에 적어넣고 덴마크에 온 내가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피했다니…. 이 일은 내게 큰 교훈을 줬다. 그 뒤로 나는 덴마크에 있으면서 유럽 곳곳을 여행하며 여러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제서야 지원서에 적은 포부처럼 다양한 문화를 선입견 없이 접할 수 있었다.

교환학생 생활, 환상을 벗다

사실 나는 막연하게 교환학생 생활에 환상을 가졌다. 페이스북에 교환학생을 떠난 친구들이 올린 사진처럼 외국인과 어울리며 얘기 나누고 친해지는 멋진 생활을 꿈꿨다.
하지만 현실은 무척 달랐다. 이미 유럽인은 유럽인끼리, 미국인은 미국인끼리 서로 무리 지어 친해져 있었다. 그들과 겉치레 인사를 나눌 뿐 친구가 되긴 힘들어 보였다. 나도 한국인 친구들과 함께 다녔으니 그들이 보기에 나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기는 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말 걸지 못하는 내 성격도 한몫 했다.
교환학생으로 덴마크에 와서도 외국인 친구 한 명 못 만들고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돌아갈까 걱정됐다. 먼저 교환을 다녀온 친구에게 원래 이런 거냐며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친구는 원래 다 그렇다며 나를 위로했지만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언어 교환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수업시간에 다른 학생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친구의 약속에 함께 나가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는 걱정은 여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교환학생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돌이켜 봤다. 내가 외국인 친구를 만나려고 교환학생을 왔을까?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이 이해되지만, 만약 그 것이 아니라면 지금 나는 소중한 시간을 고민과 걱정으로 버리는 것이다.
내가 덴마크에 교환학생으로 지원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많이 갖는 것.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내 꿈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할 일이 없던 날은 내게 없었다. 고등학생 시절과 재수생 때는 대입이라는 큰 과업이 항상 마음 속에 얹혀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내게 주어진 일을 하느라 바쁘게 지냈다. 개강하면 수업 듣고 시험 준비하고, 교내 방송국과 집행부 일도 했다.
많을 일을 하면서 나는 당장 해야 할 일을 할뿐 내가 어떤 삶을 원하고, 내 꿈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핑계를 대자면 아무런 걱정 없이, 해야 할 일 없이 나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덴마크에서는 달랐다. 내게 주어진 의무는 일주일에 몇 시간 안 되는 수업 시간뿐이었다. 처음으로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압박 없이 자유롭게 보낼 시간이 생겼다. 내가 교환학생으로 지원한 까닭은 이런 시간을 내게 주고 싶어서였다.
초심을 곱씹어 본 뒤에야 외국에 왔으니 외국인을 많이 만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벗어났다. 외국인 친구 사귀려 아등바등할 시간에 밖에 나가서 동네를 걷는 일이 내게는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등 떠밀려 사는 삶을 넘어

덴마크에서 지내는 한 학기 동안 많은 시간을 홀로 보냈다. 자전거를 타고 공항 근처까지 가보기도 하고 책을 들고 주위 공원에 나가 독서도 하고 다이어리에 그때그때 드는 생각을 적기도 했다. 시내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거나 코펜하겐 동서남북 중 어디로 갈지만 정하고 무작정 집을 나와 노래를 들으며 걸을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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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코펜하겐과 서울이 가장 다른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사람들이 여유가 있고 행복해 보여요”라고 답할 것이다. 내가 코펜하겐에 잠깐 머물렀기 때문에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걸음걸이마저 여유로워 보였다. 오후 4시만 돼도 공원은 운동하는 사람과 독서하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코펜하겐에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나는 자동차 경적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런 코펜하겐은 나에게 가장 완벽한 도시였다. 집 근처 어딜 가든 나와 같이 가만히 앉아 있으러 온 사람들이 수두룩했으니 말이다. 공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행복해 보일까 생각했다. 왜 나는 서울에서 항상 그렇게 바쁘게 걷고 살았을까 후회했다. 물론 내가 여유로울 수 있었던 이유는 여유 시간이 넘치는 교환학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덴마크에 있으면서 나는 여유를 느꼈고, 그 시간 속에서 나에 대해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다. 아직 밝히긴 부끄럽지만 내 꿈도 결정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 덴마크 생활을 돌이켜 보면 아쉬움도 남는다. 왜 적극적으로 수업을 듣고 사람을 만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덴마크에서 보낸 한 학기는 나에게 정말 많은 것을 남겼다. 혼자 요리·설거지·세탁·청소 등 모든 일을 처리하며 부모님께 감사함을 느꼈다. 지금껏 바쁘다는 핑계로 집안일을 하지 않았던 내가 얼마나 철 없었는지 깨달았다. 생활비를 아끼려고 이곳저곳 마트를 들러 가격을 비교하며 장 보는 법도 배웠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노트북이 망가진 상황에서 차근차근 방법을 찾아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법도 깨우쳤다. 덴마크에서 사귄 친구들과 밤새도록 한 주제에 관해 토론하면서 내가 갖고 있던 편협한 생각을 고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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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교환학생 생활이 꼭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자신있게 대답 못하겠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덴마크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점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하겠다.
덴마크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동아리나 대외 활동 등에 목 매며 바쁘게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분이 나빠 휴대전화만 챙겨 나선 길에 우연히 학교 응원가 원곡을 연주하는 거리 음악가를 만나고, 그 앞에 앉아 음악을 듣고 기분이 풀렸던 작은 행복을 결코 만나지 못했겠지.
앞으로 한국에서 내 꿈을 향해 바쁘게 걸어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바쁨은 전과 다르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나는 덴마크에서 산책 중에 봤던 노을과 강가 그리고 그때 했던 생각이 나와 함께다.
교환학생 생활은 내가 한 단계 더 성장할 계기였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교환학생에 지원할지 말지 고민한다면 꼭 말해주고 싶다. 사소한 이유라도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면 다녀왔을 때 절대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교환학생 일기 by 소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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