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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는 수업, ‘PBL’을 아시나요?

2013년 6월?세종시 교육 공무원 방문단(아래 방문단)이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가 지원한 IT 수업 현장을 둘러보러 덴마크에 온 적 있다. 덴마크는 이미 90년대 중반부터교육 현장에 IT 교육정보화 정책을 적용하던 터였다. 컴퓨터 화상 채팅과 클라우드로 토론 수업을 진행하는 점도 흥미로웠지만, 제일 인상깊었던 것은 PBL 수업이다.

헬러럽 공립 초등학교 전경(사진: 김희욱)

 
‘프로젝트 기반 학습(PBL?Project Based Learning)’은 학습자가 능동적으로 능력을 계발하도록 이끄는 교육 방식이다. 기계적인 암기 주입식 학습은 멀리한다.
방문단은 덴마크 코펜하겐 인근 헬러럽 공립 초등학교(Hellerup Skole)에서 5학년 학급 수업을 참관했다. 그 학급은 ‘인터뷰’를 주제로 PBL 수업을 진행 중이었다. 교사는 인터뷰가 무엇인지 10분 정도 직접 설명한 뒤 학생을 몇 개 조로 나눴다. 학생들은 10대에서 70대까지 각 연령대에서 한 명 씩 인터뷰하라는 과제를 받았다. 인터뷰 주제는 ‘사람들의 고민’이었다. 학생들은 조별로 어떤 식으로 인터뷰를 할 계획인지 얘기했다.
일주일 뒤 학생들은 주변 사람을 취재하고 돌아왔다. 학생들은 마이크를 손에 쥐고 인터뷰한 내용을 직접 발표했다. 스스로 과제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고 이를 실천한 뒤 결과를 자기 목소리로 발표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언젠가는 꼭 이런 수업 방식을 한국에 소개하고 싶었다.
EBS, 덴마크 PBL 교육 현장 취재에 동행하다
교육방송공사(EBS)가 그럴 기회를 마련했다. EBS 다큐멘터리 제작진(아래 제작진)이 내게 연락했다. 덴마크 교실을 취재해 한국에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싶다고 했다.
한국 교육 현장은 이면적이다. 학업 성취도는 1등이지만 학업 흥미도는 꼴등이다. 한국 ?학생은 정말 공부하기 싫지만 밤 새워 공부해야 하는 모순 속에 산다. 제작진은 한국 학생도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게 이번 다큐멘터리의 주제라고 설명했다. 나는 흔쾌히 덴마크 취재에 코디네이터로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방송을 맞아 사전 답사부터 촬영까지 내가 겪은 일을 공유하고자 이 글을 쓴다.
사전 답사
2015년 9월, 2년 만에 헬러럽 초등학교를 다시 찾았다. 학교는 모든 공간을 배울거리로 채웠다. 뜬금 없이 건물 가운데 음악홀이 나타났다. 컴퓨터실, 목공소, 심지어 교실마저 벽 없이 연결돼 있다. 용도에 따라 각종 집기로 공간을 구획해뒀을뿐이다. 문도 벽도 없다. 마냥 걷다보면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이어지는 공간이 마치 미로처럼 느껴졌다.
공간을 대체로 개방한 채 기능별로 구획만 했다. 사진 왼쪽 아래는 컴퓨터 사용 공간이다(사진: 김희욱)

이런 식으로 꾸민 공간은 학생의 창의성을 자극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 언제 어디서든 모여 앉아 대화를 시작할 수 있으니 PBL을 자연스레 체득할 훌륭한 환경이기도 하잖나. 휴게실부터 과학실, 뜨개질실, 음악실은 물론이고 복도에도 책을 읽거나 얘기 나눌 공간이 곳곳에 마련돼 있었다.
헬러럽 공립 초등학교 중앙 계단(사진: 김희욱)

헬러럽 공립 초등학교 음악홀(사진: 김희욱)

촬영 첫 날
촬영 첫 날은 오리엔테이션으로 시작했다. 촬영에 협조해 준 학생들에게 한국의 교육 현실을 간략히 소개하고 오늘 촬영하는 목적을 설명했다. 학교에서 진행하는 수업 방식을 한국에 소개한다고 말하니 학생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카메라를 쳐다본다.
사진 : 김희욱

4?5?6학년 세 개 학년에서 각각 한 학급씩 모여 난민(refugees)이라는 주제로 PBL 수업을 들었다. 최근 난민 사태 때문에 덴마크 안에서도 정부와 시민 단체가 갈등을 벌인 터였다. 난민을 수용해야 한다는 시민단체와 난민 유입을 억제해야 한다는 정부가 부딪혔다. 이런 배경지식과 함께 난민과 이민자의 차이점을 먼저 배운 뒤 본격적으로 난민을 수용해야 하는 이유를 두고 PBL 수업을 실시했다.
교사가 난민 문제를 세계에 알린 에이란의 사진을 보여주고 시리아 및 다른 아프리카의 난민 문제를 설명했다(사진: 김희욱)

교사 3명이 난민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주제를 제시했다. 학생들은 무작위로 나뉘어 조별로 다루고 싶은 주제를 골랐다. 교사가 제시한 자료와 더불어 조별로 자료를 조사하며 발견한 흥미로운 것을 메모했다.
조별 토론이 끝난 뒤에는 UNHCR(유엔난민기구) 직원이 교실에 방문해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는 난민 사태를 설명했다. 강연을 들은 학생들은 다시 조별로 흩어져 자료 조사 후 느낀 점을 토론했다. 수업 막바지에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조별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요령을 알려줬다.
사진: 김희욱

이 날 하루 동안 덴마크 초등학생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PBL 수업 주제는 교과목에 구애 받지 않았다. 학생들 스스로 현실과 밀접한 주제를 고른 뒤 책뿐 아니라 인터넷 등 새로운 매체를 적극 활용해 과제를 수행했다.
IT가 발젼한 지금, 책과 교사에만 의존하는 기존 교육 방식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런 판단으로 시작한 PBL 수업이 교육 현장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직접 볼 수 있던 소중한 기회였다.
촬영 둘째 날
덴마크 올보대학교(Aalborg University)에서 난민학(global refugees)을 배우는 학급에 양해를 구하고 수업을 청강했다. 여학우가 대다수였다. 아시아인도 한 명 있었다. 교수들이 간단히 주제를 설명하며 수업을 시작했다.
올보대학교 국제난민학 수업을 참관 중이다(사진: 김희욱)

15분 동안 강의를 한 뒤 나머지 시간은 조별 활동과 토론, 프레젠테이션에 썼다. 대학교 수업도 PBL 중심으로 이뤄졌다. 교수가 지식을 한 방향으로 전달하지 않았다. 배경 지식과 토론 주제를 던져줄 뿐이다. 학습은 개인이 논제를 조사하고 해석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학생에게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관심도에 따라 문제를 선택하고 해결하도록 요구한다. 또 수업 과정 중에 지속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지식과 문제 해결 능력을 습득한다.
교수는 학습 결과에 학생의 의견과 관심을 반영하려고 노력한다. 함께 탐구하고 배우는 자로서 학생들끼리 동등하게 협력하는 구조를 짜도록 돕는다.
사진 : 김희욱

나는 한국에서 16년 동안 교육과정을 밟았다. 덴마크에서는 교환학생과 대학원 생활을 합쳐 3년 동안 배울 기회가 있었다.
한국에서 오랜 기간 공부한 나는 덴마크 학생을 보면서 제작진의 메시지에 공감했다. 정보 사회의 교육 패러다임은 교사 중심에서 학생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육(teaching)은 학습(learning)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취재하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난 날 나는 어땠는가. 고등학생 때는 같은 반 학우를 이기고 좋은 대학교에 가려고 발버둥치고, 대학교에서는 더 좋은 학점을 받으려고 온갖 부스러기 정보만 긁어모으지 않았나. 덴마크식 교육을 받았다면 내 가치관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촬영 셋째 날
셋째 날은 해외에 PBL 교수법을 전달하려던 전문가를 만났다. 국제 교육 개발을 지원하는 시민단체 CICED(Community for International Cooperation in Education and Development)에서 부의장으로 일하는 조니 밸처슨(Johnny Baltzersen)이다. 그는 PBL 수업법을 전하러 몽골에 파견된 전문가다.
덴마크 교육당국은 1960년대 PBL을 처음 도입했다. 조니 밸처슨은1992년 PBL을 몽골에 소개할 때 현지에 맞는 교육법이 무엇인지 먼저 물어봤다고 말했다.
PBL의 가장 큰 목적은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생각과 견해를 갖고 있는지 배우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도 의문을 갖고 현상의 의미를 살피는 분석적 습관을 기른다. 주변 사람과 대화하는 협동 학습(collaborative learning)에서 그들이 지닌 다양한 가치관을 배운다. 지식을 공유하며 다양한 시각과 견해를 종합하고, 그 속에서 갈등 요소를 발굴한다. 덕분에 다차원적 사고력을 배양한다. 자기 목소리로 대화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역시 학습이라고 여긴다.
덴마크 국제외교부가 소개한 조치 밸처슨 CICED 부의장과 인터뷰(사진: 김희욱)

인터뷰를 마치고 헬러럽 초등학교로 돌아왔다. 일주일 동안 난민 프로젝트를 마친 학생들의 발표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다.
교사들은 지금까지 과제를 수행하며 배운 내용을 자신 생각대로 자유롭게 발표를 하라고 말했다. 인터넷으로 봤던 난민 기사에 나온 내용을 앵무새처럼 되읊지 말고 “틀을 깨라(think out of the box)”라는 주문이다. 알아서 발표를 준비하다 잘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따로 찾아오라고 했다. 학생들은 조별로 발표를 준비하다 도움이 필요하면 앉은 자리에서 교사를 불렀다.
그동안 조사한 내용을 한데 모으고, 발표에서 각자 맡을 역할을 나눴다. 준비하는 방식도 조마다 다르다. 난민 수용과 억제 정책을 주제로 발표할 학생들은 충돌하는 두 입장을 각각 포스터로 만들었다. 난민 이동 경로를 설명할 조는 직접 지도를 만들었다.
사진 : 김희욱

사진 : 김희욱

중간중간 교사들이 돌아다니며 학생들에게 다가가 조언을 건네기도 하고, 학생들이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교사를 찾아와 질문하기도 한다.
사진 : 김희욱

조원끼리 리허설을 마친 뒤 발표가 시작됐다. 20분 동안 각자 역할을 나눈대로 발표한다. 조별로 준비한 위치에서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발표했다.
촬영팀은 당황했다. 메인 스크린 앞에 카메라 3대를 설치해뒀는데 막상 학생들이 발표하는 장소는 제멋대로였기 때문이다. 교사 앞에서 평가 받으려고 발표하는 한국과 달리, 덴마크 학생은 준비한 주제를 다른 조 학우들에게 설명하고 지식을 나누는데 집중했다.
( 사진 : 김희욱 )

모든 조가 발표를 마친 뒤에는 조별로 조장을 뽑아 모의 UN 회의를 열었다. 조장은 한 UN 회원국의 대표가 돼 그 나라의 난민 정책을 대변했다.
( 사진 : 김희욱 )

학생들이 UN 회원국 난민 정책을 알 수 있던 이유는 한 덴마크 기자가 훌륭한 자료를 건넸기 때문이다. 그 는 나라별로 난민 정책을 정리한 표를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덴마크 기자가 학생들의 발표에 쓰라고 건넨 자료다. 나라별 난민 정책을 보기 좋게 정리해뒀다(사진: 김희욱)

모의 UN 회의를 마친 뒤에는 덴마크에 사는 난민을 초대해 직접 이야기를 들었다. 교사가 가르칠 수 없는 이야기를 난민에게 직접 듣는 산 교육이다.
2012년 덴마크에 온 시리아 난민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다(사진: 김희욱)

촬영 일정이 끝났다. 카메라 때문에 부담스럽거나 성가시기도 했을텐데 잘 협조해준 학생들이 고마웠다. 또 PBL 수업을 오랜 시간 준비한 교사 3명도 존경스러웠다.
모든 일정을 소화하며 덴마크를 행복한 나라로 만든 세 가지 비결을 배웠다. 사회구성원 각자가 가진 재능을 모아 조화를 이끌어낸다.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대화로 합의점을 찾는다. 각자가 자기 목소리를 갖고 산다.
공부의 재구성
PBL 교수법을 통해 대한민국 교육에 미래상을 제시하는 2부작 다큐멘터리 <공부의 재구성>이 2월15일부터 이틀 동안 방송됐다. EBS와 다큐멘터리를 함께 만든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다큐멘터리를 유튜브에 공개했다. 다큐멘터리 전편을 보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참조하자. 한국 교육 현장도 학생이 살아 숨쉬는 교실로 발전하길 기대한다.

ander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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